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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루이나 사회민주당 당수
몽고메리 킬라한 번즈
Montgomery Kellaghan Burns
출생
1869년 3월 4일
루이나 포트메이슨 록크로프트
사망
1937년 11월 2일 (향년 68세)
루이나 빈덴브루크
묘소
빈덴브루크 로즈힐 묘지
국적
별칭
폭동의 왕
철로 위의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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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패트릭 번즈
어머니 엘리자 번즈
형제자매
남동생 아서 번즈
배우자
캐서린 도런 (1897년 결혼)
학력
포트메이슨 공립학교 (중퇴)
소속 정당
지역구
빈덴브루크 제2선거구
경력
빈덴브루크 중앙철도 청소부
기관차 화부
화부 조합 포트메이슨 지부 서기
화부 조합 기관지 부편집장
화부 조합 사무총장
초대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 위원장
초대 루이나 사회민주당 당수
제34·35대 하원의원
1. 개요2. 생애
2.1. 철로에서 자란 소년2.2. 화부 조합2.3. 철도노동자연맹 창설2.4. 1916년 파업2.5. 수감과 전향2.6. 사회민주당2.7. 만년
3. 선거 이력4. 사상5. 어록6. 기타

1. 개요 [편집]

재판장님, 저는 이 법정이 무엇을 심리하고 있는지 압니다. 여기서 다투어지는 것은 전보 몇 통이 아니라, 굶는 사람이 굶지 않겠다고 말할 권리입니다. 저는 그 권리를 부인하는 어떤 판결도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형을 선고하십시오. 다만 그 형이 저 혼자에게만 내려진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1916년 12월 14일, 금지명령 위반 재판의 최후진술

루이나의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정치인.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RRWF)을 창설해 루이나 최초의 산업별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었고, 1916년 빈덴브루크 철도 총파업을 지휘했다. 파업 실패 후 수감 생활을 거치며 사회주의자로 전향해 1918년 루이나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그가 남긴 조직은 4년 만에 무너졌고, 그가 이끈 파업은 패배했으며, 그가 세운 정당은 생전에 집권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번즈는 루이나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인물로 남아 있다. 직종과 등급으로 갈라진 노동자를 하나로 묶는다는 발상, 국가가 사법부와 군을 동원해 자본의 편에 설 수 있다는 폭로, 그리고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독자 정당이라는 구상이 모두 그의 활동을 통해 루이나 사회에 처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루이나 노동총동맹루이나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노선이 정반대이면서도 나란히 번즈를 자기 계보의 출발점으로 내세운다.

2. 생애 [편집]

2.1. 철로에서 자란 소년 [편집]

1869년 3월 4일 포트메이슨 외곽의 철도 마을 록크로프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패트릭 번즈는 선로 보수반의 일용 노동자였고, 어머니 엘리자는 하숙을 쳐서 살림을 보탰다. 형제 다섯 중 셋이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다.

번즈는 열네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빈덴브루크 중앙철도의 조차장 청소부로 일을 시작했다. 열여섯에 화부가 되어 기관실에 올랐고, 이후 8년간 야간 화물열차를 탔다. 정규 교육은 여기서 끝났지만 독학은 평생 이어졌다. 그는 승무 대기 시간에 도서관을 드나들었고, 스무 살 무렵에는 지부 회의에서 서기를 맡아 회의록을 정리했다. 이 시기에 몸에 밴 문장력은 훗날 그의 최대 무기가 된다.

2.2. 화부 조합 [편집]

1890년 화부 조합 포트메이슨 지부 서기로 선출되면서 조합 활동을 시작했다. 1896년 조합 기관지의 부편집장, 1904년 사무총장이 되었다. 조합은 상호부조와 사망보험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온건한 직종 조직이었고, 번즈도 처음에는 그 방식에 만족했다. 그는 조합비를 성실히 걷고 유족 급여를 제때 지급하는 일에서 보람을 찾았다.

생각이 바뀐 것은 사무총장으로서 각지의 사고와 분쟁을 처리하면서였다. 화부가 죽으면 조합이 유족에게 300 USD를 지급했지만, 같은 사고로 죽은 조차장 인부의 유족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합원은 파업에서 보호받았지만 조합에 들어올 수 없는 지상직 노동자는 그대로 해고되었다. 그는 기관지 사설에서 "우리는 우리보다 약한 사람들의 등을 밟고 서 있다"고 썼다.

1912년 조합 대의원대회에 그는 모든 철도 노동자를 직종 구분 없이 받아들이는 단일 조합 설립안을 제출했다. 안건은 압도적 표차로 부결되었다. 숙련 조합원들은 비숙련 노동자와 같은 조합에 속하는 것이 자신들의 교섭력을 떨어뜨린다고 보았다. 이듬해 초 번즈는 사무총장직을 사임했다.

2.3. 철도노동자연맹 창설 [편집]

1913년 6월 22일 빈덴브루크 캐슬베리가의 강당에서 루이나 철도노동자연맹 창립대회가 열렸다. 참석자 187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어떤 조합에도 속한 적 없는 지상직 노동자였다. 번즈는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규약 제1조에 "철도의 운행과 유지에 노동을 제공하는 모든 사람"을 조합원으로 규정하는 문구를 넣었다.

첫해 조합원은 8,400명에 그쳤으나, 1914년 4월 오크데일 철도 파업에서 12일 만에 임금 삭감을 철회시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형제단 조합들이 한 번도 해내지 못한 승리였다. 번즈는 이후 2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하루 서너 차례씩 연설했고, 1916년 3월 조합원은 14만 명, 지부는 465개에 이르렀다.

이 시기 그의 판단 착오도 함께 기록되어야 한다. 1915년 대의원대회에서 조합원 자격을 시민권자로 제한하는 조항이 상정되었을 때, 번즈는 반대 의견을 냈으나 강하게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여성 조합원 가입을 인정하는 개정안을 통과시킨 같은 대회에서 이민 노동자를 사실상 배제하는 조항이 함께 통과되었고, 이 결정은 이듬해 파업에서 그대로 대가를 치른다.

2.4. 1916년 파업 [편집]

1916년 3월 하트웰 궤도차량 주식회사 공장에서 살쾡이파업이 터졌을 때 번즈는 신문 보도를 보고 그 사실을 알았다. 그는 처음부터 전국적 확대에 신중했다. 제조업체와의 분쟁에 철도망 전체를 거는 것은 승산이 낮고, 폭력 사태가 벌어지면 정부에 개입 명분을 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월 대의원대회에서 애나 콜필드의 연설 이후 보이콧이 만장일치로 결의되자, 그는 자신의 반대를 접고 지휘를 맡았다. 4월 17일 시작된 보이콧에는 나흘 만에 12만 5천 명이, 절정기에는 19만 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정부가 전국 30여 개 법원에서 파업 선동 자체를 금지하는 가처분 명령을 받아내고 군경을 투입하면서 판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번즈는 금지명령을 무시할 것을 각 지부에 지시했고, 동시에 폭력 행사를 금지하는 지침을 반복해 내려보냈다. 두 지시는 현실에서 양립하지 않았다. 5월 1일 그는 전국 총파업을 호소했으나 루이나 노동총동맹이 이를 거부하면서 확산은 멈췄다.

5월 2일 우편물 운송 방해 공모 혐의로 체포된 그는 보석으로 풀려났다가, 5월 12일 금지명령 불복종 혐의로 다시 구속되었다. 이번에는 보석을 거부하고 수감을 택했다. 9월 시작된 공모 재판에서 변호인 에드워드 L. 크로스가 루이나 철도총지배인협회의 회의록을 제출해 "공모한 쪽은 철도회사"라고 반격했고, 검찰은 10월 5일 공모 혐의를 취하했다. 그러나 배심원 없이 판사 단독으로 진행된 금지명령 위반 재판에서 그는 12월 14일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5. 수감과 전향 [편집]

번즈는 브라이어필드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이 6개월이 그의 생애를 갈랐다. 전국의 사회주의자들이 편지와 책을 보냈고, 그는 감방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사회주의 문헌을 읽었다. 훗날 그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같은 법 앞에 서 있다는 믿음을 브라이어필드의 감방에 두고 왔다"고 말했다.

1917년 6월 출소하던 날 빈덴브루크 중앙역에는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RRWF는 이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합원은 19,000명 아래로 떨어졌고 지부 대부분이 문을 닫은 상태였다. 같은 해 9월 30일 열린 최종 대의원대회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연설했고, 대회는 해산을 결의했다.

2.6. 사회민주당 [편집]

1918년 4월 번즈는 옛 RRWF 지부 간부들과 각지의 사회주의 단체를 모아 루이나 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당수가 되었다. 창당 발기인 312명 중 절반 이상이 RRWF 출신이었다.

그의 정치 노선은 처음부터 의회주의였다. 1922년 공산계 활동가들이 별도의 적색노동조합평의회를 조직하고 당내에서 무장 노선을 주장했을 때, 번즈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관련 인사들을 당에서 배제했다. 이 결정은 당의 합법 공간을 지켜냈다는 평가와, 노동운동의 좌파를 스스로 잘라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다.

1920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하원 4석을 얻어 처음 원내에 진입했으나, 번즈 본인은 빈덴브루크 제2선거구에서 1,200여 표 차로 낙선했다. 1924년 같은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처음으로 의석을 얻었고 1928년 재선했다. 의정 활동의 대부분은 쟁의 관련 입법과 산업재해 보상, 아동노동 금지에 집중되었다. 그가 발의한 법안 가운데 생전에 통과된 것은 없다.

2.7. 만년 [편집]

1932년 건강 악화로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당수직에서 물러났다. 대공황기 사민당이 세를 불리는 동안 그는 벨포르 근교에서 요양하며 회고록을 집필했다. 1937년 11월 2일 68세로 사망했다. 장례는 빈덴브루크에서 노동조합장으로 치러졌고, 운구 행렬을 따라 걸은 인원이 2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묘소는 빈덴브루크 로즈힐 묘지에 있다.

3. 선거 이력 [편집]

연도
선거구
정당
득표율
결과
1920년
빈덴브루크 제2
사회민주당
31.4%
낙선
1924년
빈덴브루크 제2
사회민주당
42.9%
당선
1928년
빈덴브루크 제2
사회민주당
46.2%
당선

4. 사상 [편집]

번즈의 사상은 세 단계로 나뉜다. 화부 조합 시기에는 직종 조합의 상호부조를 신뢰했고, RRWF 시기에는 산업별 조직과 동조 행동을 통한 단체교섭에 집중했으며, 수감 이후에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독자 정당을 주장했다.

일관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조직에서 나와야 하며 외부의 시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둘째,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노동운동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파업 기간 내내 재산 파괴를 금지했고 그레이스턴 방화 사건 이후 지부에 강한 경고를 내렸으나, 지부의 자발적 행동을 실제로 통제하지는 못했다.

말년의 회고록에서 그는 RRWF의 가장 큰 실책으로 이민 노동자 배제를 꼽았다. 조합이 문을 닫아걸었기 때문에 그 문 앞에 선 사람들이 대체 노동자로 투입되었고, 그것이 패배의 절반이었다는 것이다.

5. 어록 [편집]

우리는 우리보다 약한 사람들의 등을 밟고 서 있습니다. 그 위에서 아무리 오래 버텨 봐야 그것은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11년, 화부 조합 기관지 사설
열차를 움직이고 모두를 끌어내려면 금지명령 이상의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전진하고 있습니다.

1916년 4월 25일, 각 지부에 보낸 전보
강한 사람과 넓은 마음만이 금권정치와 오만한 독점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군대, 금지명령, 어용 언론에 겁먹지 마십시오. 파업을 지속하고 확고한 자세를 유지하십시오. 폭력을 행사하지 마십시오.

1916년 4월 27일, 조합원에게 보낸 호소문
저들은 제게 6개월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값으로 이 나라가 누구 편인지를 알아냈으니, 손해 본 거래는 아닙니다.

1917년 6월, 출소 직후 빈덴브루크 중앙역 연설
우리는 문을 닫아걸고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 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우리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진 것은 군대 때문이 아니라 그 문 때문이었습니다.

1934년, 회고록 초고

6. 기타 [편집]

  • 신문들은 1916년 파업 당시 그를 "폭동의 왕", "독재자"로 불렀다. 반면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순회 연설의 인상 때문에 "철로 위의 설교자"로 통했다.
  • RRWF 기관지 《철도노동자》의 사설은 창간부터 폐간까지 대부분 그가 직접 썼다. 이 사설들을 묶은 선집이 1952년 처음 출간되었다.
  • 회고록은 미완으로 남았고, 남동생 아서 번즈가 유고를 정리해 1941년 《선로 위에서》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 루이나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매년 창립기념일에 그의 묘소를 참배한다. 루이나 노동총동맹 산하 전국철도노동조합도 같은 계보를 표방해, 두 총연맹이 같은 인물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가 이어지고 있다.
  • 그가 복역한 브라이어필드 교도소는 1978년 폐쇄되었고, 수감동 일부가 보존되어 전시 공간으로 쓰인다.
  • 1989년 루이나 교직원노동조합 창립대회에서 초대 위원장이 인용한 문구도 그의 출소 연설이었다.